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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하여

광주 5.18 민주화 운동 의의

by 드림별 2023. 3. 2.

5.18 민주화 운동이란 1980년 5월 18일~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의 부당한 공권력에 대항하여 맞서며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목숨을 건 역사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피격하면서 결국 유신정권이 무너지게 됩니다. 10.26 사태 이후로 유신정권은 무너졌지만 권력은 아주 불안정해졌고 결국 비상계엄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인 12.12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대통령이 있었지만 실권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자신의 상급자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강제로 납치, 체포하면서 결국 권력을 탈취하게 되는 쿠데타, 일종의 군사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후 전두환 신군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1980년 5월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를 알고 전국적으로 시민들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5월에는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게 됩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시위에는 10만 명이 모였으며 이러한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신군부는 쿠데타와 같은 조치를 통하여 명실 상부하게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결국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합니다.

 

계엄령은 헌법, 법률 일부의 효력을 일시 중지하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사법, 치안을 유지하는 긴급조치로 국회를 해산시키며 이제부터 정부기관들은 국가보위대책기구를 만들어서 그것에 복속된다는 라는 내용의 안을 통과시킵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의 명분을 북한의 침공 가능성이 있다고 내세웠지만 그렇다면 북한과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군대는 휴전선 최전방이 아닌 후방 광주로 이동하게 됩니다. 전국에 군대를 배치하고 군대 중 대다수의 병력이 대학가로 갔으며 모든 국민의 정치활동을 일체 금지시킵니다. 이로 인해 결국 시위는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광주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국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교 교정에 우리나라 최정예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들이 파견되어 주둔했으며 학생들의 등교를 막으려는 과정에서 모여든 학생들과 공수부대의 충돌이 빚어지게 됩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아주 과격하고 가혹한 진압 방식을 택하였고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여기에 격분한 시민들이 결국 시내 곳곳에서 일어나 충돌이 벌어지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후 계속해서 사태가 전개되면서 5월 20일 이후 전남도청은 시민군이 장악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계엄군이 광주를 봉쇄하고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마침내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수백 발의 총격을 가합니다. 이때 장갑차에 기관총까지 동원했으며 옥상에는 저격수를 배치했으며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시민들에게까지 무차별 총격과 폭력이 쏟아집니다.

 

공수부대는 시민들에게 가혹하고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폭력을 자행했는데 국민의 부대인 국군 공수부대가 이렇게 국민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점이 많습니다. 한 국가의 군대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이런 식의 가혹하게 행동한 사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1980년 5월 26일 시민들이 도청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계엄군이 시내로 다시 진입하려 하자 시민수습위원들은 맨몸으로 저항하는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며 중재와 협상 시도했습니다. 병력을 철수하고 폭력진압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라, 잡아간 시민들을 석방하라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계엄군에게는 그 어떤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것에 대항하여 총을 들었다는 것을 반드시 역사에 남기기 위해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바로 전남도청에서 결사적으로 대항하여 싸웠고 죽음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신념과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광주에서의 비극적인 사건은 그 후 은폐되었지만 결국 7년 만에 6월 항쟁을 통해 바로 알려지고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광주의 아픔이 대한민국의 아픔으로 승화되어 지금은 역사에서 광주는 민주주의의 초석을 세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수많은 광주시민들의 죽음을 바탕으로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알리겠다는 시민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것을 쟁취해 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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