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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하여

1987년 6월 항쟁, 시대적 배경과 의미

by 드림별 2023. 3. 3.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말합니다.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이 염원이 담긴 항쟁으로 1980년대에 수많은 시위가 있었고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기까지 안타깝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6월 항쟁, 민주주의를 위하여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찰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박종철 군을 체포하여 심문하는 도중 책상을 탁 치자 억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는 말도 안 되는 사망 사유를 언론에 발표했습니다. 국민들은 믿지 않았고 사망 원인이 은폐 조작되었다며 진상 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진상이 밝혀진 결과 박종철의 죽음이 우연한 실수가 아닌 고문으로 인한 것임이 밝혀졌는데 당시 정부는 이와 같은 투쟁이 거셀 때마다 갖가지 간첩 사건과 용공 사건들을 조작해 이를 탄압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고문은 필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대통령 직선제 내용이 포함되도록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국민의 요구를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고 민주정의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새 대통령 후보로 노태후를 선출합니다. 

 

5.18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이은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 전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5월 27일 전국의 민주화 운동 지도자 2200여 명이 함께 세운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출범했고 반독재 투쟁 세력은 하나로 결집됩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

이어진 시위에서 6월 9일에 연세대학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또 발생하면서 국민들의 분노와 민주화 열망은 극에 다다르게 됩니다. 드디어 1987년 6월 10일 고문 살인을 규탄하고 민주 헌법을 쟁취하려는 대규모 시위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시위가 벌어진 6월 10일 하루에만 전국 22개 도시에선 학생과 시민 3천8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서울의 시위대는 70~80년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던 명동성당 쪽으로 밀려났으며 시위는 밤까지 이어졌고 이어 5박 6일간의 명동성당 농성은 투쟁의 구실점이 되었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자발적인 모금으로 명동성당의 농성을 지지했고 성당 안팎으로 시민들이 보내는 다양한 격려의 글들이 나붙었습니다. 또한 시위가 거듭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이를 방관하지 않게 되었고 시민, 학생, 노동자,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직장인들도 시위에 대거 참여하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뜨거운 염원이 이어집니다.

 

시민들이 적극 동참하면서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습니다.

 

1987년-6월-항쟁-시위
1987년 6월 항쟁 시위 사진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열기는 뜨거워졌고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요구는 전국의 도시로 번져 150만 명이 참여한 항쟁의 거대한 물결이 이룹니다.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의 6만여 명의 경찰이 배치되었지만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요 도시에서 날마다 수백만명의 시위대가 경찰을 무장해제 시키기도 하면서 독재타도를 외쳤습니다.

 

 

그 후 최루탄으로 숨진 이한열의 장례식은 백만명의 추모객이 모인 가운데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이 죽음은 6월 항쟁이 일어난 의미가 무엇인지 민주주의를 향한 길은 얼마나 험난하고 숭고한 길인지를 깨닫게 했습니다.

 

6월 항쟁의 결과와 의미

마침내 군사독재 정권은 굴복했고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직선제 개헌, 민주화를 위해 시위하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석방 및 김대중 사면 복권, 언론의 자유등의 내용 담겨있습니다.

 

대통령 직선제가 받아들여진 것은 민중이 얻어낸 승리였지만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선거에 이길 승산이 없던 상황에서 자신들의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계획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민들의 힘으로 16년 만에 되찾은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야당의 김영삼 후보, 김대중 후보는 결굴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고 야당을 지지하던 국민들의 표는 양분되고 맙니다. 결국 후보단일화의 실패로 군부독재를 청산하려던 국민들의 염원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6월 항쟁으로 민중의 힘을 확인한 노동자들은 이를 신군부가 만든 노동 악법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으로 발전시켜 갔고 우리의 민주화 운동은 통일, 환경, 평화, 인권과 여성운동 등 여러 부문으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진정한 참여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6월 항쟁은 남녀노소 지역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온 국민이 민주주의란 목표아래 하나가 됐던 대한민국의 소중한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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