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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하여

을사늑약(을사조약)이란

by 드림별 2023. 3. 5.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 통치를 알리는 시작이었습니다. 강제로 체결된 부당한 조약이므로 을사늑약이 정확한 표현이며 그동안 을사조약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대한제국 치욕이자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을사늑약의 시작

대한제국 침략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1905년 11월 9일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경성으로 보냅니다.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황궁을 일본 군대로 포위하고 궐내로 들어간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승낙하시든 거부하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거부한다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지 생각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노골적인 위협과 공갈을 자행하며 조약체결을 강요합니다.

 

 고종황제가 이를 완강히 거부했고 이 일로 긴급회의를 주도한 대신들은 긴 회의 끝에 체결은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이 회의를 알게 된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이 모여 있던 중명전으로 쳐들어갑니다.

 

 

그는 총칼을 든 병사들을 배치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형성하며 회유와 강압 끝에 1905년 11월 17일 사실상 식민통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을사늑약을 체결합니다.

 

을사오적, 나라를 판 이완용

이때 찬성한 이완용을 포함한 5명 이완용, 권중현,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을 을사오적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완용은 조약체결 찬성을 강력하게 말하며 이토의 눈에 들게 됩니다. 이완용의 적극 찬성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일본의 반식민지가 됩니다.

 

이렇게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대신의 찬성을 빌미로 을사늑약 체결을 선포합니다. 이는 국가 간의 조약의 필요한 적법한 절차를 전혀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이자 불법한 조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당한 조약 체결에 민중들은 격분하게 됩니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조선을 철저하게 통치하고 감시할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통감부는 을사늑약 체결 후 설치돼서 이후 조선총독부의 모체가 되며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뿐 아니라 모든 분야를 제멋대로 간섭하고 감독하는 실질적 통치기관이었습니다. 1906년 3월 이토 히로부미는 제1대 통감이 됩니다.

 

당시 분노한 민중들에게 매국노 이완용은 잠시 외교권을 맡긴 것뿐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자신은 문제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불합리한 상황에 분개하고 정의를 지키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자신만의 이익만을 챙긴 매국노 이완용은 이후 새로운 내각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리고 경제적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광산사무국 총재이 자리도 갖게 되면서 지위와 재력을 모두 두 손에 쥐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고 한국을 일본에 병합시키겠다는 충격적인 맹세를 하는데 이것은 대한제국을 일본에 바치겠다는 충성의 맹세였으며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을 절대적으로 신임하게 됩니다.

 

1907년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파기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해서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하면 실패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크게 분노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쫓아낼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이완용을 시켜 고종에게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일본 천황에게 직접 사과하라는 내용을 전합니다. 무례한 일본의 요구에 고종은 반대했고 한때 고종을 보필했던 대신 이완용은 일본의 편에 서서 고종을 위협하는 적이 돼버립니다.

 

 

1907년 6월 결국 고종황제는 폐위당하고 시간이 흘러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두 달 뒤 이완용은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에 의해 칼에 찔려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생사를 오갔지만 친일매국 관료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던 그는 당대 최고의 의료진을 제공받고 살아납니다. 이후 매국행위에 더욱 전념하게 됩니다.

 

경술국치, 한일강제병합조약

1910년 6월 일본에서 새로운 통감이 오고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통치 권한을 일본이 갖게 된다는 의미의 한일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8월 29일 이를 공포합니다.

 

이 말도 안 되는 한일강제병합조약을 가장 먼저 제안한 주범은 매국노 이완용이었으며 이 사건을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 경술국치라고 부릅니다.

 

그 후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어린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이순신전 같은 위인전을 금서로 지정하는 등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의 정신까지 말살하려 합니다. 나라와 맞바꾼 막대한 부로 이완용은 끝까지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팔아선 안 될 나라를 팔아서 누려서는 안 될 부귀영화를 누린 자 이완용, 그는 친일파의 대명사로 나라를 판 매국노로 영원히 기억되고 손가락질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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