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에 대하여

영웅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by 드림별 2023. 3. 5.

안중근 의사독립운동가로 민족의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교육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으며 힘을 걸러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과 싸울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안중근 의사는 항일무장투쟁을 결심하고 하얼빈에서의 의거를 결심하게 됩니다.

 

 

영웅 안중근 의사와 단지동맹

 

1909년 당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대한제국 그 당시는 일본은 대한제국을 삼키겠다는 야욕이 점점 커지던 상황이었고 노골적으로 우리의 국정에 간섭하면서 그 야욕을 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극심한 탄압으로 일제에 반대하는 항일 운동을 이어가는 것 역시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안중근-의사-사형-직전-마지막-모습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모습

 

안중근 의사와 동료들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항일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꺼져가는 항일 운동의 불씨를 깨우기 위해서 결의를 다지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단지동맹이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고 손가락 마디를 자른 후 혈서를 쓰고 독립 의지를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혈맹을 통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서로의 의지를 굳건히 맹세한 것으로 당시 항일 독립운동은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손가락 한 마디를 자르면서 일제를 몰아내겠다는 대한 독립의 의지를 다졌고 안중근 의사와 동료들은 구체적인 목표를 세웁니다.

 

 

바로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일제에 충성하는 매국노 이완용 암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 안에 그 계획을 성사하지 못할 시 자결로 동포에서 속죄하기로 다짐합니다. 마지막으로 안중근과 동료들은 이 결의를 다지면서 태극지에 피로 대한독립 글씨를 새깁니다.

 

하얼빈 의거 계획과 실행

단지동맹 이후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방문한다는 소식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로서는 엄청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일본 또는 일본의 반식민지나 다름없던 대한제국 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란 쉽지 않았는데 해외 순방은 상대적으로 경비가 허술했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거사인 만큼 안중근과 동료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는 신속하고 조용하게 하얼빈에서의 거사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만 알고 정확히 어느 역에서 몇 시에 내릴지는 몰랐으며 얼굴조차 제대로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팀으로 나눠서 안중근은 하얼빈, 다른 두 명은 다른 역에서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 모든 문제를 뒤로한 채 각 역으로 떠난 안중근과 동료들, 이번에 실패한다면 또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숨을 내놓고도 성공을 보장하기 힘들었던 상황이며 누구보다 고뇌했을 테지만 안중근 의사는 그 위험 속으로 걸어갑니다.

 

10월 26일 거사의 날이 다가오고 낡은 양복을 입고 권총을 챙긴 안중근 의사는 오전 7시경 이토가 도착할 예정인 하얼빈 역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토를 환영하기 위해 모은 인파 속에 섞여 무사히 하얼빈역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합니다.

 

오전 9시경 경적소리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들어오고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엿보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와 열 걸음 남짓으로 가까워졌을 때 마침내 품에서 총을 꺼내 총알을 발사합니다.

 

혹시나 그를 잘못 알아봤을까 봐 옆에 있던 수행원 3명에게도 총을 발사했고 총성과 함께 하얼빈역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은 저항하지 않고 체포되었으면 "대한국 만세"를 외칩니다.

 

1910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의 첫 번째 공개재판이 열리게 됩니다. 그는 법정에서 거침없이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과 의거의 명분, 자신의 소신을 밝힙니다. 그는 이 재판을 통해 국제사회에 일본의 침략사실과 대한제국의 억울함과 처한 현실 그리고 일제의 부당함을 고발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중근 의사의 거침없는 발언에 당황한 재판장은 곧장 방청객을 퇴장시키고 비공개 재판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그 뒤로 매일같이 진행된 몇 번의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 일본은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을 오해해서 죽였다고 말하면 사형을 면하게 해 주겠다며 끊임없이 회유합니다.

 

이를 거절한 안중근 의사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 목숨 같은 건 생각하지 않으니 유혹하려 하지 말라고 하며 마지막 진술에서 '이토를 죽인 건 자객으로서 한일이 아니다.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행한 일이다. 전쟁에 나아가 포로가 되어 여기에 서게 된 것이니 나는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합니다.

 

영원히 기억될 영웅의 마지막

1910년 2월 14일 결국 일제의 재판정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이 소식은 안중근의 가족에게도 전해졌고

소식을 들은 안중근의 두 동생이 찾아와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만든 수의를 전달합니다.

큰 뜻을 품고 집을 떠나 온 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리운 가족들, 한 개인의 인간적 아픔을 홀로 삼켜야만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가 보낸 수의를 입고 당당하게 마지막 사진을 찍고 1910년 3월 26일 32살의 나이로 순국합니다.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영웅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죽음 이후 그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책 동양평화론을 남기게 됩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영웅 안중근의 이야기는 국내에서 뮤지컬로 유명해졌으며 작년 12월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남았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