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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하여

충무공 이순신 장군 3대 대첩 해전 순서

by 드림별 2023. 3. 8.

 

이순신 장군은 한국사 최고 위인으로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한 분입니다. 임진왜란 중 45전 40승 5무의 전적으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던 불멸의 명장이었으며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영웅이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으로  한반도대첩, 명량해전, 노량대첩이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영화-명량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

 

충무공 이순신 (1545년~1598년)

1545년 4월 28일 사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순신 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전쟁놀이는 좋아하는 등 무장으로써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10년 동안 문관 시험을 준비하다가 뒤늦게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훗날 난중일기와 여러 편의 시조, 한시를 남길 정도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보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상대로 45전 40승 5무의 전적으로 무패의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탁월한 전략가이자 전술가였고 자랑스러운 조선의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은 1598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으며 시간이 흘러 1643년 인조대에 무인 최고의 영예인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아 충무공 이순신이라 불리게 됩니다. 

 

원칙을 지키는 강직함과 곧은 성품, 공과 사가 분명한 인물이었으며 그래서인지 유난히 질투와 모함도 많이 받고 두 번의 백의종군과 강등, 고문 등 수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덕분에 파직이나 좌천이 됐다가도 금세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임진왜란 (1592년~1598년)

15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이순신 장군은 어린 시절 친구인 류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됩니다. 전라 좌수사가 된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바로 예감하고 조선의 수군력 강화를 위해 철저히 대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나대용이라는 부하를 시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1592년 임진년 5월 23일 일본이 700여 척의 배를 끌고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을 처참하게 파괴하는 7년간의 전쟁 임진왜란이 시작됩니다. 일본군은 단 보름 만에 수도 한양을 함락시키고 선조는 피신길에 오르며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까지 가게 됩니다.

 

  • 최초의 승리 옥포해전

그러던 1592년 6월 경상우수사로 있던 원균의 지원 요청을 받고 옥포 앞바다로 가던 이순신 장군은 정박해 있던 일본의 수군함대 26척을 무찌릅니다. 이것은 임진왜란 최초로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로 옥포해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잇따라 승전보를 거두게 됩니다.

 

1. 한산도대첩

이순신 장군의 옥포,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잇따라 일본에게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에 일본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정예 병력 73척과 구키 요시타카가 이끄는 40여 척으로 거제도 지역 총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1592년 8월 11일 이순신 장군은 엄청난 수의 일본 수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파악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싸울 준비를 시작합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의 수군도 합류했는데 그렇게 모인 조선의 수군은 거북선 3척과 판옥선 52척으로 총 55척이었습니다.

 

 

1592년 8월 13일 당포 앞바다에 도착한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 73척이 견내량에 먼저 들어와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견내량은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조선 수군의 주력인 판옥선의 운영이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싸울 전략을 세웁니다.

 

판옥선으로 일본 수군을 공격한 뒤 반격해 오면 한산도 앞바다로 마치 도망치듯 일본 수군을 유인하며 그 유명한 학익진 전술을 펼치게 됩니다. 학익진이란 학이 날개를 펴듯이 진을 친다는 뜻으로 거북선이 돌격해 적을 혼란에 빠뜨린 사이 일본수군을 포위한 판옥선들이 포를 쏘아 순식간에 격파하는 전술이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의 수군은 일본 수군의 적함 47척을 부수고 12척을 빼앗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를 한산도에서 거둔 큰 승리라 하여 한산도대첩이라고 부릅니다.

 

  • 한산도대첩 승리가 가져다준 의미

한산도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둔 덕분에 조선의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등 주요 지대를 지켜냈고 백성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며 조선의 의병활동에도 더욱 불을 지피는 결과를 주게 됩니다.

 

이후 1593년 이순신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해군으로 보면 최고의 자리인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을 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일본군의 우세로 돌아갔지만 조선 수군의 활약, 의병들의 등장, 명나라의 지원 등으로 인해 점차 일본이 밀리는 형국이 됩니다.

 

  • 백의종군

백의종군이란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른다는 의미로 관직 없이 말단으로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일본은 조선 조정이 이순신을 제거하도록 만들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리게 되고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순신은 기후와 불리한 여건 등을 보고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출격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분노하며 왕명을 거역했다고 하여 1597년 2월 이순신을 파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했습니다.

 

그렇게 한양으로 압송된 이순신 장군은 그동안 나라를 구한 공로를 인정받기는 커녕 혹독한 심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많은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에 처해질 위기까지 몰리게 되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다시 백의종군을 명령받습니다.

 

  • 재차의 왜란, 정유재란이 일어나다

1597년 잠잠했던 일본은 재침략하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 원균이 그해 7월에 있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조선 함대와 수군들이 궤멸되고 원균 역시 전사하게 됩니다. 그제야 조정은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킵니다.

 

2. 명량해전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돌아왔을 때 조선 수군의 배는 겨우 12척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이후 배 한 척을 더 구해 남아있는 전선과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하여 1597년 10월 25일 13척의 배로 명량해전에 뛰어들게 됩니다.

 

 

일본 수군이 133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이순신 장군은 '필사즉생 필생즉사: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다'하고 말하며 결의를 다집니다. 또한 명량의 지형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하여 전술을 짰으며 그 결과 적함 30여 척을 격파시키며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3. 노량해전

1598년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고 향후 전쟁 의지를 꺾기 위해 명나라의 수군과 함께 노량 앞바다에서 임진왜란 최후의 격전 노량해전을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선두에서 싸우다고 일본군의 유탄을 맞고 전사하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눈을 감게 되고 그렇게 조선군은 장군의 죽음을 감추고 싸웠으며 결국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전투가 다 끝난 뒤에 알려졌고 많은 이들이 슬퍼했다고 합니다. 1598년 12월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도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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