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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하여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업적

by 드림별 2023. 3. 9.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해 폭탄을 던집니다. 그의 의거는 성공했고 임시정부의 위상을 높이며 꺼져가는 항일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살린 대사건이었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매헌입니다. 농민들과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해 야학당을 열고 교재로 농민독본을 저술했습니다. 그 후 부흥원을 만들고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 월진회를 조직하며 농민계몽과 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시작합니다.

 

윤봉길-의사
윤봉길 의사

 

그렇게 농촌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무엇이든 실천했지만 일본의 감시는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이에 윤봉길 의사는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부출가생불환, 사나이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조국 독립을 위해 떠날 것을 결심합니다.

 

1930년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아내와 어린 자식을 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떠납니다. 국경을 넘어 중국 칭다오에 도착 후 1931년 드디어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그즈음 일본은 중국인과 조선인 두 민족을 갈라놓으려 하고 있었고 백범 김구 선생은 새로운 힘을 모으고자 의열투쟁을 위한 비밀 결사대 한인애국단을 조직합니다.

 

 

  • 한인애국단 이봉창 의사의 의거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인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처단하기 위해 도쿄 한복판 경시청 앞에서 일왕의 마차 행렬을 향해 폭탄을 던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폭탄의 위력은 약했고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 채 10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봉창 의사는 비록 목표로 했던 일왕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이 중국 일본 등 전 세계 언론에서 대서특필되면서 우리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김구를 찾는 청년들이 많아졌으며 윤봉길 의사도 김구 선생을 찾아가 한인애국단에 들어갑니다. 이즈음 일본제국은 상하이에 군대를 파견해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하여 상하이로 입성합니다.

 

훙커우공원 의거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축하 행사를 일왕의 생일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거행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님을 찾아가 이는 다시없을 기회라며 의거를 다시 하자고 제의합니다.

 

그 후 극비리에 폭탄을 준비했고 성능 확인을 위해 시험까지 하며 물통 모양의 폭탄과 도시락 모양을 만들고 의거를 준비합니다. 의거 전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을 만나 자신의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말하며 자신의 새로 산 시계를 그의 낡은 시계와 바꿉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 안에는 일본인 1만 명, 상하이 침략 일본군 1만 명과 그 밖에 각국의 사절과 초청자들 등이 모여 있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행사장 식장으로 다가가 폭탄을 던집니다.

 

 

폭발의 위력으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과 거류민단장이 사망하고 육군 제9사단장 왼쪽 다리 절단, 해군 제3함대 사령관 오른쪽 눈 실명, , 주공공사 오른쪽 다리 절단, 상하이 거류민단 서기장 부상, 주중 총영사 파편관 통상 등 5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거사 직후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1932년 5월 25일 일본은 윤봉길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는 두 눈이 가려진 채 형틀에 묶여 사행을 당합니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습니다.

 

조국의 독립이 꼭 실현되리라 믿으며 대한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난다.
비록 일본이 내 목숨을 거둘지라도 내 독립정신은 죽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일본 제국주의가 쇠망하는 날까지 지하에서 계속 싸울 것이다.     

 

윤봉길 의사가 남긴 업적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대한민국이 일본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상하이 의거는 중국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았고 독립을 염원하는 조선의 국민들은 임시정부를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한국은 독립을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는 순국한 지 14년 만에 해방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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