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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하여

동학농민운동 혁명 전개 과정과 결과

by 드림별 2023. 3. 10.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이 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있었던 민중들의 궐로 평범한 백성들이 다 같이 힘을 합쳐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던 사건입니다. 무능한 조선 정부, 외세의 불평등한 조약, 조선을 넘보는 일본과 청나라로 인해 당시 조선은 혼돈 그 자체였으며 동학농민운동이 탄생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

 

동학농민운동-그림
동학농민운동

 

동학의 의미

1860년 도학, 풍속학, 민간 종교 등에 통달한 몰락 양반 출신 최제우가 경북 일대에서 동학이라는 이름의 종교를 창시합니다. 동학의 핵심 사상은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며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서학과 뜻이 의미하는 바가 닮아있었으며 한국토종 종교라는 이유로 거부감 없이 민중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갑니다.

 

하지만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으므로 이러한 평등사상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동학을 인정하지 못하였고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를 혹세무민(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시킨다)이라는 죄로 1864년 대구에서 사형을 시킵니다.

 

 

최제우가 죽은 후 최시형이 동학의 2대 교주가 됩니다. 최시형은 동학을 조금 더 조직적이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라는 교리집을 발간하게 됩니다. 동학은 한반도 남부와 중부 전체로 퍼졌으며 농민과 몰락 양반은 물론 몰락하지 않은 양반들 상당수도 동학을 따르게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시작

당시는 조선이 개화를 할 무렵이었고 구식군인들의 반란사건인 임오군란, 지식인 개화파들의 쿠데타였던 갑신정변, 조선에 진출하려는 청나라와 일본, 서양인들로 인해 사회는 대단히 불안정했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은 더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결국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 봉기가 발생하게 됩니다. 

 

고부농민봉기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 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로 당시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부정부패,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고 있었습니다. 조병갑은 마을에 저수지가 있었음에도 만석보라는 물을 가두는 시설을 만들어 물세를 받았으며 이를 항의하러 온 백성들을 곤장으로 때려죽이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전봉준을 결단을 내리고 강경파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사람을 모이고 1894년 1월 농민 1천여 명과 관아를 습격해 고부를 점령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 고부민란, 고부농민봉기입니다.

(사발통문 : 사람을 불러 모으는 공식문서로서 사발모양처럼 둥그렇게 참여자들의 이름을 적어서 주동자를 알 수 없게 하는 문서)

 

 

당시 조선에는 민란이나 반란이 일어나면 반란 주동자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타협해서 큰 내전으로 번지지 않게끔 하는 안핵사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고부민란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안핵사로 이용태를 파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용태는 농민들의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별다를 수사 없이 주동자를 잡아가두고 고문하고 죽이는 등의 횡포 부립니다. 이런 악행을 보고 전봉준은 이전보다 큰 규모의 거사를 준비하게 됩니다. 결국 이용태는 고부 농민 봉기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산봉기

전봉준과 함께 다른 동학의 접주 김개남, 손화중이 합류하고 이렇게 3 대장이 모여 동학군을 창의군이라고 부르며 1894년 3월 백산봉기를 일으키네 됩니다. 백산의 뜻은 동학군이 모두 흰옷을 입고 있어서 산이 하얗게 보인다고 해서 백산이라 불렀습니다. 이후 동학군은 규모를 더 늘려나갑니다.

 

동학군은 고부를 넘어 부안, 고창, 태인, 금주 등을 장악했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군이 나섰지만 패하고 맙니다. 정식 훈련을 받은 군인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졌다는 것만 봐도 당시 조선의 국력이 얼마나 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연달아 전투에 승리함으로써 동학군은 전주성까지 입성하게 됩니다. 전주는 전라도의 핵심도시로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전라도 전체가 동학군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청과 일본의 파병, 그리고 전쟁

이런 상황이 되자 조선에서는 청에 파병 요청을 하게 됩니다. 이때를 기회로 삼은 일본은 텐진조약을 구실로 멋대로 조선으로 군대를 파병합니다. 1895년 5월 5일 청나라 군대가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했고 바로 다음날 일본군대도 인천 제물포에 상륙했습니다.

 

동학군이 차지한 전주성 인근이 아닌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 상륙한 일본 측의 돌발행동에 조선 정부와 동학군은 당황했습니다. 강제로 도움을 주려고 하고 서울로 쳐들어올 듯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일본, 서로가 원치 않는 상황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철수를 위해 조선과 동학군은 적절한 합의점을 찾고 화약을 맺은 뒤 동학군은 자체해산하기로 합니다.

 

1894년 5월 8일 전봉준은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홍계훈에게 강화내용 12가지 조건인 '폐정개혁안'을 제시했고 홍계훈은 이를 수락합니다. 폐정개혁안이 조선 정부에게 수용된 이 사건을 '전주화약'이라고 합니다. 이 폐정개혁안을 이행하기 위해 민간백성들이 직접 개혁안을 실천할 수 있는 기구 집강소를 지방 곳곳에 세우게 합니다.

 

도움을 요청한 사건이 해결되었으니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에 철수를 정중하게 부탁하지만 일본은 바로 서울로 진격해 4시간 만에 경복궁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동학군과 합의했던 개혁안을 백지화하고 일본의 주도 하에 새롭게 개혁을 실시하겠다고 선포합니다. 

 

동시에 일본은 아산만의 있던 청나라군을 기습하면서 청일전쟁이 터집니다. 물러날 줄 알았던 일본군과 청나라군이 조선땅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전봉준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1894년 9월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킵니다.

 

 

1차 동학농민운동의 경우는 조선 정부를 상대호 거병했기 때문에 민란의 성격이 강했고 2차 동학농민운동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으로 의병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우금치 전투

전봉준과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군이 서울로 가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모이고 공주로 진격하기 위해 우금치 고개로 향했지만 이미 고개 정상에 일본군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강력한 무기들로 무장한 일본을 상대로 이기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의 시신으로 뒤덮였고 4만 명의 동학군 증 3천 명만 살아서 도주합니다.

 

목숨을 건진 전봉준은 논산에서 5백 정도의 병력으로 항전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남은 동학군마저 일본군에게 연이어 패배했고 11월 전봉준은 전주성으로 가기 위해 태인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맙니다.

 

결국 동학군은 와해되어버리고 이후 전봉준은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 됩니다. 남은 동학군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이듬해 1895년 전멸당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은 안타까운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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