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삼일절의 의미
우리의 민족 운동은 삼일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1919년 3월 1일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외치게 됩니다. 3.1 운동은 무장투쟁이 아닌 평화적인 만세 시위였으며 이것이 중요한 이유를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3.1 운동의 배경
3.1 운동은 국외적 배경으로는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시점에서 민족자결주의라는 약소민족들이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게 하기 위해서 해방시켜 주자는 주장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제국주의에 핍박받는 약소 민족을 지원해 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며 우리 민족은 우리나라도 독립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들이 독립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지를 다지게 됩니다.
그 시작은 1919년 2월 8일 날 동경에서 부터 비롯되게 됩니다.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이광수,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등 여러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적의 심장부인 YMCA회관에서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2.8 독립선언이었습니다.
그 후 송계백이라는 학생이 2.8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감춰가지고 들여와서 우리 민족 대표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민족 대표들은 일본에서 우리의 어린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을 알고 우리나라 우리 땅에서도 3.1 운동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독립의지를 온 세계에 알리려는 평화적 만세 시위 3.1 운동입니다.
국내적 배경으로는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우리 백성들 사이에서는 일본이 독살한 거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고 일제에게 짓밟힌 억울함이 터져 나오기 직전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민족 운동의 시작
기미독립선언서가 제작이 되고 그것을 태극기와 함께 은밀히 인쇄하게 됩니다. 독립만세운동의 날짜는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서 3월 1일로 정해졌고 장소는 탑골공원 파고다 공원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삼일절 만세 운동의 목적은 대표들이 3월 1일에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 학생들이 모여서 태극기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일반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우리의 독립의지를 밝히는 평화적 만세 시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 온 세계가 알게 되고 그러면 여러 강한 나라들이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평화적 만세시위로 구상이 된 것이 바로 이 3.1 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3월 1일 당일 민족대표들이 파고다 공원으로 가려하는데 이미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있었고 여기서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이 점점 커져 폭력투쟁으로 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꾸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3.1 운동은 아직 어린 학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민족대표들이 오질 않자 한 학생이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그때 학생들은 준비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게 됩니다. 우리 민족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너도나도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됩니다.
우리는 평화적 만세를 외쳤지만 일본은 우리를 평화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헌병 경찰들에 의해 우리 민족은 무자비하게 살상되고 맙니다. 삼일운동은 서울 종로에서 시작이 되어 중소도시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만주 연해주 미주 일본 할 것 없이 전 세계적으로 번져 나가게 됩니다.
3.1 운동은 끝나고 그 결과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강압적이던 일제 통치 방식이 문화통치로 변하게 되었고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 3.1 운동 이후 20년대부터는 국내적으로 사회, 경제, 문화적 민족 운동을 벌이고 국외적으로는 다양한 외교적 활동과 의거활동, 그리고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1 운동은 독립운동의 분수령이라고 부릅니다. 이전 1910년대 억압과 어둠의 시대였다면 1920년대는 활발한 독립운동이 되었으며 그 계기가 바로 3.1 운동이었습니다.
3.1 운동의 영웅, 유관순 열사
민중 모두가 영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중 유관순 열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당시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만세 소리가 학교 담장 밖에서 들리게 되자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가 만세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첫 번째 만세운동이 끝나고는 중소도시로 옮겨져 2단계 만세 운동으로 번지는데 유관순 열사는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만세시위를 하는데 그녀의 눈앞에서 부모님이 일본 헌병에게 살해를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눈앞에서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한 어린 유관순 열사는 부모님의 시체를 부둥켜 앉고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감옥에 투옥되게 됩니다. 유관순 열사는 재판을 받을 때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내 나라 내 땅에서 만세 시위를 하는 것이 무엇이 죄입니까? 오히려 죄 없는 사람을 침략하고 강제로 억압하는 당신들이 죄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또한 옥중에서도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등의 용감한 모습을 보이다가 지하 독방에 갇히고 100여 가지의 수많은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출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때 유관순 열사의 나이 18세였습니다.
- 일제 강점기 1910~1945
나라를 잃고 이름을 잃고 살아야 했던 35년 동안 우리의 선조들은 치열하게 우리의 것을 일본으로부터 다시 되찾기 위해 숭고한 목숨을 바치며 투쟁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는 자유롭게 꿈을 꿀 수 있게 되었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흘린 피와 눈물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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